하느님의 종 125위 복자 반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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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7. 22발행 [1176호]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16>최필공(토마스,1744~1801)ㆍ최필제(베드로, 1770~1801)

신해박해 때 굴복... 보배로운 피로 배교 기워갚아

최필공(토마스)과 최필제(베드로)는 사촌지간으로 둘 다 의원(醫員) 출신이다. 조선시대 의원은 중인 계급에 속했다. 초창기 한국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유난히 중인이 많았다. 조광(이냐시오) 고려대 명예교수는 '조선 후기 천주교 지도층의 특성' 논문에서 진산사건(1791년) 이후 신유박해(1801년) 때까지 천주교 지도급 인사 38명 가운데 21명(55%)이 중인이라고 분석했다. 신분 미상자(3명)를 제외하면 60%에 가깝다.

 당시 중인은 사회 불만 계급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양반도, 평민도 아닌 중인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었던 정조 임금은 중인들이 천주교에 심취할 가능성이 크고, 그들이 천주교에 빠지는 것은 그들 잘못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 때문이라고 봤다. 그래서 탄압하기보다는 가급적 교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박해의 광풍이 몰아쳤다. 최필공과 최필제는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인 1801년 순교의 칼을 받았다.


▲ 첫 번째 칼이 목을 비켜가자 최필공이 흐르는 피를 움켜쥐고 '보배로운 피'라고 외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 교우들과 모임 중인 최필제 약방에 포졸들이 들이닥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1744년 한양 의원 집안에서 태어난 최필공(崔必恭)은 1790년 사촌동생 최필제와 함께 김범우(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의 나이 46살 때였다. 그의 조상 중에는 조정에서 의관으로 봉직한 이들도 있었지만 최필공은 관직도 없는 데다 몹시 가난해 그때까지 결혼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성품은 더 없이 솔직하고 너그러웠다.

 최필공은 입교하자마자 교리를 전하고 실천하는 데 열성을 보였다. 그는 큰길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을 향해 전도했다. 오늘날 거리선교의 시조격인 셈이다. 「정조실록」 15년(1791년 10월 23일)에 "예전에는 나라의 금법을 두려워해 어두운 골방에서 모이던 자들이 지금은 대낮에 마음대로 행하고 공공연히 전파한다. 예전에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써서 겹겹으로 싸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는데, 지금은 제멋대로 간행하여 경향에 반포한다"는 글이 실릴 정도였다.

 경거사괴(京居邪魁), 즉 서울에 사는 사학 괴수로 지목된 최필공은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몇몇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체포됐다. 이때 함께 체포된 동료들은 대부분 배교하고 석방됐지만 그는 교리를 설명하면서 굳세게 신앙을 지켰다. 그러자 관리들은 이 사실을 정조에게 보고했고, 정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하라고 명했다.

 조정은 최필공을 배교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신자인 그의 숙부와 동생도 옥으로 찾아와 울면서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했고, 정조는 '옥에 가두되 잘 보살펴 주도록 하라'는 등 최필공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줬다. 그는 결국 이러한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석방된 최필공은 평안도 지방 심약(조정에 올리는 약재를 검사하는 직책)에 임명됐다. 또 임금의 도움으로 결혼까지 하게 됐다. 정조는 "최필공같이 완악한 자도 교화됐다"는 말을 자주 했고, "최필공의 예에 따라 도신(道臣)이 직접 가르치고 경계하여 개과천선한 효과가 있으면 방면하라"고 지방관들을 타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깊이 자리잡은 천주 신앙이 그의 양심을 움직였다. 최필공은 3년 뒤 심약 자리를 사임하고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1794년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를 찾아가 성사를 받고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최필공은 1799년 8월 다시 체포돼 문초를 받았다. 이때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 마음이 약해져 배교했던 것을 뉘우치면서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정조는 다시 한 번 그의 마음을 되돌려 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면서 배교를 거부했다. 정조는 최필공을 참수형에 처해야 한다는 관리들 요청을 거부하고 그를 또 석방했다.

 이후 다시 체포된 최필공은 이전 행실 때문에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고, "천주교 신앙에 대한 믿음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버텼다.

 결국 사형을 선고 받은 최필공은 나이가 많은 데다 형벌과 옥고로 인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에 오를 때에는 의식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한양 서소문 밖 형장에 이르자 그의 얼굴에는 기쁨의 빛이 나타났다. 첫 번째 칼날이 그의 목을 비켜가면서 피가 흐르자 최필공은 피를 움켜쥐고 "보배로운 피"라고 외쳤다. 두 번째 칼날까지 비켜갈 수는 없었다. 그는 보배로운 피로써 신앙을 지켰다. 1801년 4월 8일, 최필공은 57살 나이로 순교했다.

 최필제(崔必悌)는 1770년 사촌형 최필공과 마찬가지로 한양 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하면서 살았다. 세례는 1790년 최필공과 함께 받았다.

 본래 성품이 진실하고 후덕했던 최필제는 사람들 사이에 어질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최필공이 어떤 일을 할 때마다 그에게 의견을 들어본 다음에 실행에 옮길 정도였다. 또 그가 파는 약은 값이 싸고 품질이 좋아 모두가 신용했다. 그때 최필공의 동생이 천주교를 헐뜯고 신자들을 욕하면서 다녔는데, '최필제만은 본받을 만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교리를 실천하는 데 전력을 쏟았던 최필제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최필공과 함께 체포됐다. 일찌감치 박해자들에게 굴복하고 석방된 최필제는 석방된 후에는 최필공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거짓 자백서를 써서 관청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필제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교회 일을 돕고 교리를 전하는 데 열중했으며, 새로 입교한 교우들을 자신의 집에 불러 모아 교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을 때는 그를 찾아가 성사를 받았으며, 자주 미사에 참례했다. 황사영(알렉시오)은 「백서」에서 이렇게 전했다.

 "…주 신부도 일찍이 그(최필제)에게 탄복하고 칭찬하여 말씀하시되 '부부가 정결을 지키는 자로서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 아주 드문데 최필제 부부는 지조가 갈수록 굳어지고, 힘써 노력하는 것이 갈수록 부지런하니 참으로 어진 사람이다'고 하였습니다.…"

 최필제는 1800년 12월 자신의 집에서 교우들과 모임을 갖던 중 체포돼 옥에 갇혔다. 최필제가 다시 체포되자 그의 부친은 놀란 나머지 병이 나서 죽게 됐다. 그때까지 미신자였던 부친은 죽을 때 세례를 받았다. 최필제는 부친이 선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달라고 형조에 청했다. 옥에서 나온 그는 장례를 치른 뒤 곧바로 형조로 가서 다시 옥에 갇혔다. 그때 형조 관리들이 그에게 넌지시 도망할 것을 귀띔해줬다. 하지만 그는 이미 순교의 각오를 다진 상태였다. 그는 옥으로 돌아올 때 몇몇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순교 원의를 나타냈다고 전해진다.

 "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전에 내가 배교했던 일을 보속하려 하네. 나의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내 머리를 바치는 것일세."

 최필제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 참수형으로 순교할 당시 그의 나이는 31살이었다. 사촌형 최필공이 순교한 후 한 달여가 지난 1801년 5월 14일의 일이었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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